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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않아요.

커피챗
2024. 11. 17. PM 4:21:43

들어가며

오랜만에 서비스 기획자와 커피챗을 나누었습니다. 유남주(가명)님은 2년차 서비스 기획자입니다. 이직하려는 이유를 묻자 현 회사는 갑을병정에서 병에 속하는 회사로, 자신이 참여한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보니 고객의 이야기를 듣기 어려워 답답했고, 그래서 자신이 만든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을 만날 수 있는 회사를 찾는다고 합니다.
유남주님은 B2B 물류 솔루션을 개발하는 SI 회사에 다닙니다. 원청사가 프로젝트 별로 하청을 주고, 하청을 받은 회사으로부터 유남주님이 근무하는 회사가 수주한 것이지요. 유남주님 입장에선 최종 사용자(Enduser)에 이르기까지 두 단계를 거치는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고객 지원과 대응을 맡는 회사가 따로 있어서 유남주님이 최종 사용자를 직접 만나기 수월하지 않고 까다로웠습니다.

멘토링

유남주님이 잡은 이력서 주제

유남주님이 잡은 이력서 주제는 하드 스킬과 소프트 스킬을 총동원해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온 2년차 서비스 기획자입니다. 왜 그렇게 잡았느냐 묻자, 사수가 없는 환경에서 어떡해서든 일을 수행하려고 기획적 기술을 동원하고, 고객사 담당자를 찾아가 도메인 지식을 전수받는 등 소프트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좋은 자세입니다. 이유가 궁금해 왜 그렇게 했냐고 묻자 유남주님은 5초 정도 고장났습니다. 어떡해서든 일을 수행하려고, 라고 유남주님은 예상대로 답변했습니다. 아직 생각의 초점을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이 한 일에 맞추는 게 분명합니다. 이럴 때는 오히려 조금 돌려서 질문하는 게 좋지요.
“유남주님, 그렇게 업무를 대하는 자세가 참 좋아보입니다. 그런 좋은 자세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어떡해서든 일을 수행하려고 한 이유가 뭐예요?”
궁금해하는 저를 앞에 두고 유남주님은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물쭈물하던 유남주님은 그냥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무의식 중에 한 행동이라 기억을 인출하기 어려웠던 것 같네요. 진짜(?) 이력서 주제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네요. 좋은 신호입니다. 프로젝트 경험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 자연스레 발견할 것 같습니다.

리뉴얼 프로젝트

이력서에 배치된 첫 번째 프로젝트는 화물 운송 연결 플랫폼을 리뉴얼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소개에 배정한 내용이 다소 많은 편인데, 프로젝트를 정의하고 설계하는 업무가 기획 업무에 포함되어서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지요. 프로젝트 소개가 아닌, 프로젝트를 수행한 유남주님을 설명하도록 고치는 건 잠시 미루고 유남주님이 실제로 수행한 업무를 살펴보겠습니다.

다크모드 지원

야간에 화물을 운송하는 화물차주, 즉 운송인의 환경을 인지하여 기획한 다크모드 기능이 참 좋아보입니다. 무엇보다 제 흥미를 끈 건 운송인들의 만족도가 크게 향상되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기능은 어떤 계기로 기획하신 거예요?”
“그야 밤엔 눈이 부실테니 다크모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자동차 네비게이션에도 이런 기능이 있잖아요”
“그렇죠. 제가 질문하는 건 바로 그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예요. 예를 들어, 밤에 눈이 부실 거라는 생각은 기획 업무를 보다 문득 떠오른 거예요? 아니면 자동차에서 사용하는 장치 중 디스플레이가 달린 장치를 조사하다 떠올린 거예요?”
그제서야 유남주님은 질문의 의도와 목적을 깨닫고는 대답을 했습니다. 유남주님의 답변을 받을 때마다 “왜요?”라는 질문을 하며 생각의 출처를 찾아들다 마침내 찾아냈습니다. 유남주님은 원청사의 PM(Project Manager)에게 여러 차례 부탁해서 운송인 몇 명의 연락처를 받았고, 운송인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유남주님에게 굳이 운송인의 연락처를 알아내 인터뷰한 이유를 묻자 운송인에게서 UX/UI가 편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 행동을 왜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웬지 이유를 알 것 같으니 다음 경험에서 확인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에 대해 너무 파고들면 유남주님 입장에선 면접 보는 기분이 들테니까요. 제 역할은 면접관이 아닌, 유남주님이 누군지 알고, 유남주님의 특성과 빛나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운송인 앱의 UI 디자인 개선

유남주님은 물류 관련 도메인을 처음 경험했다고 합니다. 신입 기획자로서 실무 기획 업무를 처음 해봐서 기획서 작성부터 헤맸는데, 도메인도 생전 처음 겪는 거라 무척 고생했다고 합니다. 유남주님은 여러 책을 사서 공부하고, 택배 운송인에게 질문하거나 발주사의 PM을 찾아가 여러 질문을 하기도 하고,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원청사 PM에게 도움을 받아 운송인을 인터뷰한 거지요.
그 과정에서 UI 디자인을 개선할 단초를 얻었다고 합니다. 유남주님은 처음엔 복잡하고 예외 상황이 많은 맥락이 화면에 담긴 기존 앱을 기반으로 기획을 했습니다. 낮은 수준으로 와이어프레임(Low-fidelity)을 만들어 운송인에게 보여주자 그들은 조작하기에 너무 복잡하다는 피드백을 주었지요. 결국 유남주님은 진행 중이던 화면 설계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만들었습니다.
“운송인 입장에선 익숙한 인터페이스가 편할텐데, 굳이 기획 중인 인터페이스를 보여준 이유는 뭐예요?”
“사용성은 실제 사용자가 사용하는 모습을 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전 버전 앱의 UX/UI가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설계된 건지 모르는데 무작정 기반으로 삼아 사용하긴 찝찝하더라고요.”
“좋네요. 근데 SI 프로젝트에서는 일정 준수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일정을 맞췄어요? 아무리 좋은 의도여도 일정이 지연되면 안 될텐데?”
유남주님은 야근을 해서라도 일정을 지켰다고 합니다. 기획을 기다리던 프리랜서 개발자에겐 개인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설득했고요. 회사 대표님은 못마땅해했지만, 결국 화면 설계 일정을 지켜서 별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무리하셨네요. 신입 기획자가 지는 범위를 넘어서는 책임이거든요. 왜 그렇게까지 한 거예요?”
“아, 제가 질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거였군요. 지금 알았어요. 몰라서 무리한 것 같아요. 근데 무리인 걸 아는 지금이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아요”
유남주님이 무리를 감수하는 이유는 사용자가 겪을 문제는 사용자에게서 파악해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신입 기획자이고 기획 업무를 가르쳐 줄 사수도 없고, 도메인 지식을 전수해줄 이도 없었기 때문에 사용자에게서 기획안을 도출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다면 유남주님은 그의 말대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화주의 운송인 예약 기능

버스를 타는 게 아닌 이상, 화주가 운송 차량을 예약하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예약하면 기대되는 효과도 예상되고요. 유남주님은 이 경험에 대해 무엇을 호소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기능은 왜 기획한 거예요?”
“리뉴얼 전에는 당일 운송 건에 대해서만 호출할 수 있었어요. 원래는 예약 체계였는데, 어떤 화주가 특수 화물 차량을 수 개월 기간을 예약해 같은 화물을 다루는 다른 화주들이 불편을 겪은 뒤로 예약 기능을 뺐대요.”
“이것도 신입 기획자가 지는 책임 범위를 넘는 것 같은데, 왜 예약 기능을 다시 넣은 거예요?”
“말씀하신대로 제가 이 기능을 넣는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었어요. 대표님도 반대하셨고요.”
UI 디자인 개선에서 고생한 유남주님은 화주 앱에선 사용자인 화주를 먼저 찾아가 인터뷰부터 하고 기획을 했습니다. 세금계산서, 재고 관리 등 기능이 화주 앱엔 많았기 때문에 유남주님은 여러 차례 화주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남주님은 화주가 운송인과 전화 통화하는 걸 듣고 의문이 들어 화주에게 질문했습니다. 지금 운송 가능한 운송인이 많은데 왜 특정 운송인을 호출하려 했는지를 말이죠. 화주에게 어떤 화물은 운송이 까다로워서 운송할 수 있는 차량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운송인 호출을 운송할 당일에만 할 수 있어서 필요한 운송 차량을 놓치는 경우가 있던 거지요.
처음엔 예약 기능을 기획했지만 승인되지는 않았습니다. 대표님은 예약 기능을 대체할 아이디어를 주어 기획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복잡했습니다. 유남주님은 화주에게 예약 기능이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유남주님은 또 다시 발로 뜁니다. 화주들을 만나며 예약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집했고, 예전에 발생한 문제를 예방하는 체계와 규칙을 기획해냅니다.
“예전에 문제를 일으켰던 기능을 굳이 다시 적용한 이유는 뭐예요?”
“저도 처음엔 다른 방식으로 예약 기능성을 제공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예약 기능이 가장 명료했어요”
“왜 그게 가장 명료하다고 판단했어요? 어떤 기획적 사고를 따른 거예요?”
“화주들께서 원하는 방식이 예약 방법이었어요. 처음엔 예약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원하는 운송인을 매칭시키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어요. 화주 사무실에 상주해서 관찰하면서요. 근데 아무리봐도 예약 방식 말고는 화주에게 쉽고 간단하고 명료한 방법은 보이지 않았어요. 애초에 용어부터 예약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용어, 규칙, 정책을 제시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죠.”
아하, 요컨데 사용자가 실제로 겪는 문제를 사용자가 실제로 사용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풀려고 했군요.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력서 주제 도출

나머지 경험들에 대해서도 유남주님의 대답에서 나오는 일관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획이든 도메인 지식이든, 기반이 거의 없던 유남주님은 기획자에게 필수 역량인 기획력(하드스킬)과 소통 능력(소프트스킬)을 소구하고 싶어했습니다. 사수없이 일해서 자신이 기획자로서 제대로 일하는지 확신이 없었기에, 다양한 문제를 어떡해서든 해결해내는 주니어 기획자롤 호소하고 싶어했지요.
유남주님이 정한 주제도 일리 있었지만, 그렇게 어떡해서든 문제를 해결해내려는 의지와 태도의 출처가 있어 보였습니다.
“일단, 유남주님이 집중하는 건 고객이 실제로 겪는 사용자 경험 문제로 보여요. 그리고 그 사용자 경험을 해결하는 방법은, 고객의 목소리로부터 문제를 정의하고, 사용자 경험에 발생한 문제를 고객의 환경에 맞춰 해결하지요. 정리하면, 고객의 목소리로부터 고객의 문제를 정의하고,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여 고객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유남주님은 다소 실망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건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하잖아요. 멘토님 말씀은 구체적이긴 하지만 딱히 저를 특정짓는 특성은 아닌 것 같아요”
“당연하지 않아요. 정책이나 규칙에서 문제를 도출해 정의하고 해결하기도 하기도 하죠. 그리고 유남주님처럼 가능한 한 고객에게 가까이 다가가 피드백을 받는 것도, 그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행동하는 걸 누구나 하지 않아요”
“하지만, 뭐랄까요. 너무 시시한 것 같아요. 매력 없다고 보지 않을까요?”
개성과 사람의 고유성, 특성에 옳고 그름,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다른 것 뿐이죠. 유남주님의 드레스 코드가 맞는 곳이 있고 없는 것 뿐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유남주님은 곧 빙그레 미소 지었습니다.
“제가 고객을 만날 수 있는 회사로 이직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마치며

제가 제안한 이력서 주제를 수용하는지와 별개로, 제가 제안한 이력서 주제를 기준으로 이력서를 어떻게 다듬을지 이야기 나눴습니다. 유남주님을 드러내지 않는 많은 설명을 이력서 주제에서 발원해 흐르도록 하는 거죠. 이들이 흘러 한 곳에 모이면 유남주라는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유남주님은 자신의 장점과 특성을 누구나 갖고 있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건 동경하고요. 그동안 혼자 일해왔지만, 동료 기획자와 함께 일해보면 문제를 정의하는 다양한 관점, 그리고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방법을 알게 될 겁니다. 사람은 당연히 서로 다르며, 서로의 생각이 어우러져 크고 복잡한 문제를 그들의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유남주님이 자신의 특성을 찾는 팀을 얼른 만나기를 바라 봅니다.

🚨 본 컨텐츠에 등장하는 인물 중 글쓴이를 제외한 모든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지명, 시간, 단체나 기관, 사건은 각색하고 창작하였습니다. 일부라도 비슷하거나 겹치는 경우는 우연히 일치하는 것이니 이 점, 양지해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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